본격적으로 추워지기 전에 훈훈한 옛이야기 한 토막 전한다.
2002년 5월 2일 밤의 일이다. 경기도 안성의 한 축산농가에서 구제역이 발생했다. 구제역 확정 보고가 농림부 상황실에 접수됐다. 상황실 근무자는 갓 임명된 초보 사무관이었다. 그는 행정고시로 임용되었기 때문에 가축질병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다만 구제역이 가축에게 매우 위험한 질병이고 전염성이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인근 지역을 긴급히 통제하고 즉각적인 살처분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상사에게 보고한 뒤 안성 지역의 부대 한 곳을 수배해 전화를 했다.
“여기는 농림부 상황실입니다. 안성 지역에 구제역이 발생해 매우 위험하니 군에서 장병들을 파견해 축산 농가를 도와 살처분을 해주셔야겠습니다.”
부대장은 어리둥절했다. 육군본부도 아니고, 국방부도 아닌 농림부 상황실에서 군인들을 이동시켜 달라니… 그래서 가축을 죽여야 한다니… 대한민국 군대를 뭘로 보는 것인가. 응답은 당연히 이렇게 나왔다(당시만 해도 일반인에게 구제역, 살처분 등은 낯선 용어였음을 감안해야 한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이 야심한 시각에 군대 이동은 불가합니다. 상급 부대의 지시 없이는 어떤 군인도 이동할 수 없습니다.”
사무관은 상급 부대 전화번호를 열심히 찾아 또 전화했다. 상급 부대도 똑같은 반응이었다. 사단장 지시가 있어야… 또 전화했다. 군단장 지시가 있어야… 군사령부 지시가 있어야… 육군본부 지시가 있어야… 결국 국방부까지 전화를 하게 됐다.
국방부에서는 농림부에서 온 전화내용을 듣고 이렇게 답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매우 급한 듯하니 안성지역 부대에 연락을 해놓지요.”
사무관은 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군대가 동원돼 살처분이 시작됐고, 동원된 장병들은 외출과 이동이 금지되는 등 각종 방역 조치가 전개됐다. 집요한 전화로 시작돼 일사불란한 군대의 지원 끝에 구제역은 비교적 빠르게 종식됐다.
며칠 뒤 장관이 국무회의에 들어가기 전 구제역 관련 내용을 보고받았다. 초보 사무관이 장관에게 말했다.
“이러저러한 과정이 있었습니다. 군대 역할이 컸으니 국방부장관님께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농림부장관은 대통령 앞에서 “국방부에서 이러저러… 긴급 대처해 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표했다. 대통령은 국방부장관에게 “수고 많았다”고 칭찬했다. 영문 모를 칭찬을 받고 국방부장관은 기분이 좋았다. 그날의 상황실장을 찾아내 또 칭찬을 했다. 상황실장도 전혀 기대하지 않은 칭찬을 받고 기분이 좋았다. 농림부로 전화해 그날의 통화자를 찾아 감사를 표했다. 뭐 그런 일을 장관님께 보고를 다하고… 그리고 물었다. 한밤중 전화를 주신 분, 직급이 어떻게 되시나요?
“네, 저는 새내기 사무관입니다.”
한편으론 기가 차고 한편으로 감탄하게 된, 칭찬 릴레이의 실제 과정이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혹은 자연스런 과정일까. 당시의 그 사무관은 지금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방역 업무를 지휘하는 자리에 있고, 현재까지 상황을 보면 방역이 성공한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그이 때문은 아니겠지만. 어찌됐든 흉흉한 시절이 막을 내리고 훈훈한 겨울이 시작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