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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의 農에세이] 받아쓰는 사람에게서-받아쓰기 잘하는 법을 배웠다

유민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자랐다.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시골을 잊지 않았고, 농업 농촌을 주제로 한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농업-식품-음식을 주제로 한 푸드 칼럼을 다수 매체에 게재하고 있다.

문득 잠에서 깨어난 밤인지 새벽인지에, 달리 할 일이 없어 손에 집히는 책을 펼쳤더니 이런 구절이 있었다.

 

저는 받아쓰는 사람입니다. 귀가 조금 큰 편이라서 그럴까요. 남의 소리를 잘 듣습니다. 잘 들어주니까, 바위와 나무가 말을 걸어옵니다. 꽃과 구름이 비밀을 털어놓습니다. 귀신이 와서 수다를 떨고, 강아지와 고양이가 고민을 늘어놓고, 돌아가신 엄마가 와서 하느님 흉을 봅니다.


물론 잘못 알아들을 때가 많습니다. 꽃 이름을 혼동하기도 하고, 새의 울음을 노래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기억하기도 하고, 중요한 대목을 빼먹기도 합니다. 안과 밖을 곧잘 뒤집고, 머리와 꼬리를 바꿔 놓습니다. 

 

받아쓰는 사람이 받아쓴 글을 보다가 문득 받아쓰기 시험을 보던 때가 떠올랐다. 주로 10개나 20개를 받아쓰곤 했는데 10개 중에 1~2개를 잘못 받아쓰곤 했다. 그것을 가리켜 ‘틀렸다’거나 ‘오답’이라고 했다. 틀리면 안 되고, 틀린 것은 나쁜 것이었으므로, 잘 받아쓰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틀린 것을 바로잡는 애를 (약간은) 열심히 썼는데, 다음 시험에 그것이 나오지는 않았다.

물론 이 기억들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앞뒤가 바뀌거나, 중요한 대목이 빠져 있거나, 수치가 잘못되어 있거나… (가령 10개 중에 1~2개만 잘 받아썼는지도 모른다).

아, 그러니까, 오늘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거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받아쓰기를 잘못하고 있는 느낌? 10개 중에 1~2개를 꼭 틀리거나 10개 중에 8~9개를 잘못 받아 적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말이다. 어떤 때는 뭘 받아쓰고 있는지조차 헷갈리고, 불러주는 문제도 아닌데 혼자 엉뚱한 걸 써놓고는 받아썼다고 우기는 느낌마저 드는 것이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 보나 마나 하얀 감자.


받아쓰는 사람이 받아쓴 글 중 하나인데 정말 잘 받아쓰지 않았나 싶다. 그가 받아쓰지 않았다면 몰랐을 뻔했다. 자주 꽃에는 자주 열매가 맺고 하얀 꽃에는 하얀 열매가 맺는다는 것을 이제 겨우 알게 된 것이다, 세상에. 수십 년 동안 꽃을 보고 열매를 보면서 도대체 뭘 배웠을까. 이런 사람 때문에 ‘헛살았다’는 단어가 살아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받아쓰기를 잘하려면, 옳게 받아쓰려면, 헛살지 않으려면, 잘 들어야 한다. 그래야 꽃만 보고도 열매를 알 수 있고, 파 보지 않고도 땅 밑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의 직업 중에 가장 잘 들을 수 있는 직업군은 무엇일까. 음악계와 농업계라는 확신이 든다. 그런데 농업의 농(農)을 들여다보면 음악을 뜻하는 曲이 딱 자리 잡고 있다. 음악과 농업은 닮은 점이 많다. 음악을 들으면 기분이 풀어지고 영감이 떠오르는데 농사도 그렇다고 많은 이들이 증거한다(물론 다른 직업군들도 그럴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