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삶을 좌우하고 술은 죽음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다. 풍문으로 들은 이야기다.
이런 반론도 풍문으로 들었다. 밥은 몸을 살리고 술은 정신을 살린다나.
풍문도 시간을 먹으면 격언이 된다. 숙성된 세월만큼 의미도 성숙해져 이런 격언이 살아남았다. 밥은 나를 살리고 술은 남을 살린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치게 똑똑해진 요즘은 ‘가벼운 반주는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말에도 코웃음을 친다. 반주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서운하기 짝이 없고, 검은 머리 짐승의 습성에 따라 별별 의심을 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런 류의 궁금증이 쌓이고 있다.
밥맛과 술맛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할까.
밥맛없는 사람과 술맛 떨어지는 사람 중에 누가 더 재수 없을까.
밥맛은 몇 개나 되고 술맛은 몇 개로 나뉘며 어느 맛이 더 심오할까. 과연 밥맛은 무엇이고 술맛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다 보니 맛이 무엇인지 가물가물 혼돈에 빠지게 됐다.
올해 개봉한 영화 중에 ‘말모이’라는 작품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한글 사전을 편찬하던 이들의 투쟁사다. 300만을 못 넘긴, 작품성 대비 아쉬운 흥행기록… 하지만 그나마도 어디냐, 300만이면 성공적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제법 많다.
그건 그렇다. 비교하자면, 말모이란 제목을 대문짝만하게 사용한 책 <도사리와 말모이, 우리말의 모든것>을 보면 수긍할 수 있다. 무려 1000쪽이 넘는 양장본(정말 고급스럽다). 순수 우리말들을 모으고 모아 흥미진진 일목요연 정리했는데 가격은 고작 29,000원이다(참고로, 도사리는 익기 전에 떨어진 열매를 뜻하고 말모이는 글자 그대로 사전의 우리말이다). 어찌나 안 팔렸는지 지금은 국립도서관에서나 구할 수 있다. 이 책에 밥맛과 술맛에 대한 설명이 친절하게 정리돼 있다. 다음은 도무지 팔리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열심히 책을 만든 저자 장승욱이 간파한 밥맛과 술맛이다(요약을 위해 약간의 각색은 했다).
밥맛에 대하여
사람은 대개 진밥으로 시작해 된밥을 거쳐 다시 진밥을 선호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 과정을 거치며 선밥도 먹고, 탄밥도 먹고, 눌은밥도 먹게 된다. 누구나 한번쯤은 대궁밥(먹다 남겨진 밥), 삼층밥, 언덕밥(일부러 한쪽은 질고 한쪽은 되게 짓는 밥) 등등을 먹고 산다. 간혹 술밥(술씨용 밥)을 맛보는 경우도 있고 급할 때는 소나기밥(급히 먹는 밥)과 새밥(새참)도 먹는다. 물론 우리는 그릇 위까지 수북하게 담은 감투밥을 먹고 싶다. 그러저러 먹고 살다 죽음에 이르면 고두밥으로 지은 멧밥을 먹게 된다.
술맛에 대하여
태어난 이래 처음 마셔 본 술을 첫술이라 한다. 밥을 처음 먹을 때 뜬 첫 숟가락도 첫술이라 하는 것과 같다. 성인이 되어 술을 본격적으로 마실 때는 배움술을 거쳐야 한다. 뭐가 뭔지 잘 모를 때 마시는 배움술이 술버릇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술은 어른에게 배워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배움술을 제대로 거치지 않으면 홧술을 마시거나, 개술(술에 취해 개처럼 되는 경우)을 마시게 된다. 그리하여 벌술을 마시고, 소나기술을 마시고, 외상술의 경지를 거치면서 술맛은 인생의 일부가 된다. 이후 안주 없이 마시는 강술(깡술)의 단계로 진입하면 비로소 술꾼이라는 호칭을 얻게 된다. 마침내 술의 최고 경지인 도술(술 마시기와 도 닦는 행위는 같다는 의미)과 열반주(술을 마시다 이 세상을 하직하는 경지)에 이르러 술의 완성이 이루어진다. 술맛이란 이처럼 심오하지만 연말연시 술자리 밥자리에서는 적당한 경지까지만 음미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