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첫눈이 쏟아진 날 강릉에서는 철쭉이 만개했다는 이례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철쭉과 같은 식물은 일정 기간의 저온을 거쳐야 꽃눈이 트이는데, 이상기후로 이러한 생리 주기가 교란된 것이다. 이 사례 말고도 요새 정해진 시기를 벗어나 꽃이 폈다는 뉴스를 자주 접하고 있다. 꽃이 일찍 핀다는 것은 작물의 생장과 번식 주기 전반에 영향을 미쳐 종자 생산 차질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한반도의 생태 시계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 특히 기후 변화로 인한 고온, 가뭄, 집중호우 등이 잦아지면서 농작물 생산 환경이 악화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안정적인 수확이 어려워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여름철 전국 평균기온은 25.6℃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매년 쌀, 채소, 과일의 생산량은 3~5%씩 감소하는 추세다.
우리나라 전체 곡물 자급률은 21% 이하로 해외 식량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국제 곡물 시장의 불안정성이 곧바로 국내 식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다.
불안정한 식량 생산 환경은 물 부족과 병충해의 확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감사원이 2023년 발표한 ‘기후 위기 적응 및 대응 실태 보고서’를 보면 2031년 이후 연간 최대 6억 2000만 톤의 물 부족에 직면할 우려가 있다고 한다. 동시에 온난화로 인해 병해충 확산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농산물의 양적 부족뿐만 아니라 질적 저하도 초래한다. 주요 곡물의 단백질, 철분, 아연 등 영양소 함량이 감소하고 있어 식량 문제를 넘어 영양 불균형, 국민 건강 위기로까지 번지고 있다.
이처럼 식량 안보는 더는 농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 안보, 국민 건강, 경제 전반과 직결된 핵심 이슈다. 우리나라는 기후변화 시나리오를 반영한 중장기 식량 안보 전략을 마련하고 기술 기반의 대응 체계를 꾸려나가고 있으나 아직 속도가 더디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2023년 ‘기후변화와 토지 보고서’에서 기후 적응형 종자 보급을 식량 안보 해법의 1순위로 꼽은 바 있다. 최근 세계적으로 종자 개량과 병해충 대응, 빅데이터 기반 정밀농업, 스마트팜 기술 등이 식량 안보의 핵심 전략으로 떠오르고 있는데, 다행히 우리나라는 이러한 기술 혁신을 향해 착실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농촌진흥청도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미래농업을 구축하기 위해 다양한 신기술 연구에 매진 중이다. 필자도 여러 유전자를 탐색하고 가뭄, 염분 관련 스트레스 저항 유전자를 발굴하는 등 동료 연구자들과 함께 급변하는 농업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연구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지금은 그동안 키워온 농업연구 기반을 바탕으로 눈앞에 다가온 위기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국가 차원의 기술 혁신 투자와 정책적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당장 눈앞의 비용 절감에 급급해 할 것이 아니라 장기적 관점에서 식량의 안정적인 생산과 공급을 위한 신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경제적인 방법이며 효율적인 대응 방안이다. 기후 위기 시대에는 기술 혁신이 식량 안보의 든든한 아군이 될 것이다. 농촌진흥청이 기술 혁신에 주력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