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27 (화)

  • 맑음동두천 -0.5℃
  • 맑음강릉 3.7℃
  • 맑음서울 -0.7℃
  • 맑음대전 2.7℃
  • 맑음대구 3.7℃
  • 맑음울산 4.6℃
  • 맑음광주 2.9℃
  • 맑음부산 6.4℃
  • 맑음고창 0.7℃
  • 구름많음제주 5.8℃
  • 맑음강화 -2.0℃
  • 맑음보은 0.7℃
  • 맑음금산 2.0℃
  • 맑음강진군 5.0℃
  • 맑음경주시 4.2℃
  • 맑음거제 5.2℃
기상청 제공

인물 포커스

감자가 바꾼 볼리비아 농업…그곳엔 ‘자립’이 남았다

고산지대에 ‘자립의 구조’를 남긴 이상계 전 KOPIA 볼리비아 센터장
“기술을 이전해 주는 건 쉽다…하지만 자립은 ‘구조’가 있어야 한다”

 

글로벌 농업 협력의 현장에서 ‘성과’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한 한국인 농업전문가가 있다. 2025년 말 임기를 마치고 귀국한 이상계 전 농촌진흥청 KOPIA(KOrea Partnership for Innovation of Agriculture) 볼리비아 센터장은 해발 2,500m가 넘는 황토밭 위에 단순한 기술 이전을 넘어 그곳 농업인들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구조를 남기고 돌아왔다.

 

볼리비아 KOPIA 센터는 2025년 12월 31일을 끝으로 15년간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2023년 4월 1일부터 그때까지 2년 9개월 동안 볼리비아 KOPIA 센터를 지켰던 이상계 센터장은 지난 15년 성과를 ‘사업’이 아닌 ‘시스템’으로 완성하는 역할을 맡았다. 기술 이전의 관리자라기보다, 구조 설계자에 가까웠다.

 

KOPIA 볼리비아 센터는 2011년 설립 이후 감자·벼·옥수수·토마토·초지 등 다양한 작목에서 성과를 쌓아왔다. 그러나 이상계 마지막 센터장이 집중한 것은 단순 성과 확장이 아니었다.

 

농진청·그린맥스 협조로 K-농기계 11종 16대 투입

 

이상계 전 센터장은 ‘볼리비아 농업인 스스로 헤쳐나가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고, 그 출발점은 감자였다.

 

그는 볼리비아 고산지대(무루마마니) 감자농업의 가장 큰 병목을 ‘씨감자 체계’로 봤다. 생산단계가 길고 인증체계가 복잡해 농가에 도달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구조였다. 이상계 전 센터장은 씨감자 생산단계를 기존 7단계에서 4단계로 단축시키는 시스템 개편을 추진했고, 무병 씨감자 생산체계를 표준화했다.

 

그 결과, 347톤의 고품질 씨감자가 증식·보급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졌다. 시범마을 생산성은 전통 재배(평균 7톤/ha) 대비 19.4톤/ha로 277% 이상 증가했다.

 

 

하지만 변화는 수확량에 그치지 않았다. 농촌진흥청 수출농업기술과와 농기계 업체인 그린맥스의 협조를 받아 2024년 12월에 한국산 감자 파종기·수확기·선별기·관리기 등 K-농기계 11종 16대가 단계적으로 도입되며 농업 노동 구조 자체가 바뀌었다. 노동력 40% 절감, 노동시간 80% 단축이라는 수치는 농업을 ‘생존 노동’에서 ‘산업 노동’으로 전환시키는 분기점이었다.

 

‘자조(自助), 협동(協同), 근면(勤勉)’. 감자 시범마을에는 협동 작목반이 만들어졌고, 생산자 커뮤니티도 형성됐다. 사업 종료 이후에도 스스로 운영되는 구조를 목표로 설계됐다. 이는 단순한 농업기술 이전이 아니라, 새마을운동 모델의 국제화였다.

 

 

벼농사 혁명…‘빗물 농업’에서 ‘관개 농업’으로 전환

 

볼리비아 벼농사는 오랫동안 천수답 중심 구조였다. 비가 오면 농사, 비가 없으면 흉작이었다. 생산성은 구조적으로 제한돼 있었다.

 

볼리비아 센터는 벼농사를 ‘재배기술’이 아니라 ‘기반시설’ 문제로 봤다. 담수재배를 위한 관개·배수로 정비, 평탄화 작업, 수리 기반 구축이 병행됐고, 3년간 200ha 규모의 담수재배 기반이 조성됐다. 여기에 품종 선정, 이앙재배, 병해충 관리, 물 관리가 결합된 담수재배 종합관리 시스템이 현장에 적용됐다.

 

성과는 즉각적이었다. 기존 밭벼 재배 수량 3.5t/ha → 담수재배 5.8t/ha → 기계이앙 적용 시 9.4t/ha로 늘었고, 최대 268%의 생산성 증가를 실현했다.

 

이는 단순 증산이 아니었다. 볼리비아 농업 역사상 처음으로 기계화·관개·재배기술이 결합된 벼 생산 구조 모델이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볼리비아 옥수수는 ‘수확량’이 아닌 ‘주권’의 문제

 

옥수수 사업의 목표도 명확했다. 옥수수는 식량자급, 그리고 종자주권이었다. 그래서 토착 옥수수 유전자원을 체계적으로 수집·보존·순화하는 구조를 설계했다. 5개 지자체에서 토착 유전자원 20종을 수집하고, 16개 유전자형 261kg의 종자를 확보했다. 이는 목표 대비 226% 초과 달성 수치였다.

 

종자 순화포, 실험포, 참여형 교육 시스템이 결합되며 농업인이 스스로 종자를 선발·관리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생산성은 평균 30% 향상됐고, 종자는 ‘외부 공급재’가 아닌 ‘공동 자산’이 됐다.

 

특히 이상계 전 센터장의 철학은 명확했다. “지원이 아닌 구조, 원조가 아닌 자립”이 그의 일관된 키워드였다.

 

 

KOPIA 성과는 ‘상’이 아니라 ‘구조’로 남았다

 

성과는 평가로도 증명됐다. KOPIA 볼리비아 센터는 2025년 전 세계 22개국 KOPIA 센터 평가에서 3위 우수센터로 선정됐고, 농촌진흥청장상을 수상했다. 이상계 전 센터장 개인은 해외농업기술개발 유공으로 행정안전부 장관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남긴 가장 큰 성과는 ‘상’이 아니다. ‘상’은 △감자 종자진흥원 설립 추진 △전국 확산형 담수재배 모델 △종자주권 기반 구조 △농업인 협동조직 시스템 등의 ‘구조’가 남긴 결과였다. 모두 ‘센터가 사라진 뒤에도 작동하는 구조’들이다.

 

이상계 전 센터장은 “남기고 싶은 건 기술이 아니라 구조였다”며 “기술은 바뀐다. 정책도 바뀐다. 하지만 구조는 남는다. 농업인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으면, 외부 지원은 언젠가 없어져도 된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볼리비아 코차밤바(Sipe Sipe)의 고산지대 농촌 마을에 남은 것은 ‘농업은 미래 산업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다.

 

이상계 전 센터장은 기술자가 아니라 설계자였고, 원조자가 아니라 구조를 만든 사람이었다. 그리고 볼리비아 농촌의 변화는 지금도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