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만든 암흑의 시대, 가슴이 찡한 사진을 봤다.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활약하던 젊은 예술가들이 귀국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음악·공연 전문잡지 <객석> 7월호에 실린 36인의 예술가들은 모두 마스크를 쓰고 서있다. 배경은 서울 약현동 중림성당이다. 100년이 넘은 역사적 성당 아래 나란히 선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 세계무대에서 활약 중인 이들이 이처럼 한 자리에 모일 수 있게 된 것은 코로나19 덕분이다. 한편으로 진기하고 한편으론 짠하다.
예술가들은 전시·공연이 끊기면 실업자가 된다. 코로나19가 이들의 무대를 잠식했으니 일이 끊겼고, 이들은 속속 안전한 한국으로 돌아와 재충전 중이라 한다. 이들을 한 자리로 불러모은 <객석> 발행인의 말을 옮긴다.
“음악가들은 태생적으로 맑고 밝습니다. 사회성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대단한 노력과 집념을 갖고 있지요. 그들은 코로나 위기 속에서도 관객과 소통하는 방법을 찾아낼 테고,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예술 관객층을 더 넓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덧붙인다.
음악인과 미술인 중 누가 더 가난한지 내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두 예술인 집단의 월평균 소득을 분석한 통계가 수 년 전 발표된 적이 있는데, 한마디로 도토리 키 재기였다. 100만원이 안 되기는 매일반. 예술은 어차피 가난을 감내해야 한다는 말을 새김질하면서, 그 인식은 과연 옳은 걸까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한 자리에 모인 젊은 예술가들의 이력을 보니 화려하고 웅장하다. 서울대, 한국예술종합학교, 모차르트 음악원, 줄리아드 음대… 공부한 여정은 물론 세계적 콩쿠르 수상 기록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러온다. 하지만 명성만큼 대우를 받고 있는지를 따져 보면 허기가 진다. 시시때때 실업자가 됨은 물론 최저 임금에도 못 미치는 예술가들이 부지기수다. 과연 우리는 이들에게 온당한 대우를 하고 있는 걸까.
갸우뚱갸우뚱 농업인을 떠올리니 예술가들 뺨치게 가난의 역사가 계속된다. 누가 더 가난한가 따지자면 농업인도 당당히 어깨를 대게 된다. 예술은 남다른 자긍심으로 견딜 수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농업도 예술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식량으로 육체를 살게 하고 예술로 정신을 살찌운다. 두 세계는 인간의 삶 속에 동등한 가치를 갖고 절대적 뿌리 역할을 해왔다. 놀랍게도 인간사회는 가장 중요한 가치를 가장 보잘것없게 대우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모순의 세계에 빠진 셈이다.
이 모순의 세계, 암흑의 시대에 살면서도 밝고 맑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뜻밖에 많다. 첼리스트 강승민의 말을 옮긴다(강승민은 한국인 최초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수상하고 독일에서 활동 중인 첼리스트다. 올해 예정돼 있던 공연이 모두 취소돼 가족 곁으로 돌아왔고, 이번 기회를 통해 일상의 소중함을 체감하고 있다고 밝혔다).
“음악은 삶의 본질입니다. 전쟁 중에도 음악은 죽은 이를 애도하고, 살아남은 이를 위로했습니다.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음악으로 희망을 전하고 싶습니다.”
농업도 음악과 같다. 農이란 글자 머리에 노래(曲)가 얹혀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곧,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할 수 있는 직업의 가치만큼 자긍심도 커져야 하고 대우도 높아지는 게 순리다. 그러려면 누가 더 가난한가를 재지 말고 누가 더 즐거운가를 따지는 사회로 진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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