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풍성한 식탁을 즐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 보통 사람들의 대부분이 ‘황제의 식탁’을 맞이하며 이맛 저맛을 비교하고 조금이라도 더 건강할 수 있는 음식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정말 오랜 기간 배고픔을 숙명처럼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우리는 벌써 과거를 잊어버렸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는 이렇듯 풍요로운 삶을 진정 축복으로 느끼는 사람이 많지 않다. 오히려 이 화려한 식탁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박현출 저 <농업의 힘> 중에서
박현출(전 농촌진흥청장) 씨는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행복을 ‘수백만 년 인간 역사에서 길게 보면 100년, 짧게는 50년 정도 이어진 극히 최근의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나마도 너그럽게 잡은 기간이다. 정확히 잡으면 20~30년밖에 안 된다. 더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고 더 건강할 수 있는 음식을 고르는 ‘특권’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현상이 수백만 년 역사 중 처음 도래한 것이다.
만일 어떤 역사가가 사람과 음식의 역사를 AD 1년부터 지금까지 기록해 왔다면, 2000~2020년을 ‘기적의 식생활 기간’이라고 쓸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음식과 식량만을 기록하지 않는다. 사람의 생활과 의식, 문화적 현상들을 종합적으로 기록하며 그것을 가리켜 문명이라 말한다. 모두가 황제의 식탁을 맛보고 있는 지금의 문명은 어느 정도 수준일까. 과학 기술과 경제생활 전반적으로 봐도 진화하는 역사만큼 고도의 수준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권력자를 보통 사람들이 선택하고 교체하기도 하는 국가 운용 방식도 가장 진화한 형태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삶의 질, 행복의 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황제의 식탁처럼 고급스럽게 살고 있을까. 최고급 맛처럼 맛있는 생활을 하고 있을까, 이것이 문제다. 가령, 과거의 어떤 시기 동안 사람들은 몹시 배고프고 가난한 삶을 보내면서도 고급스런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었다. 자기들이 살고 있는 자연환경에 맞게 나름의 생활 방식을 찾아내고 삶의 원리를 발견하며 순조롭게 일생을 마무리하는 방법을 배우고 전수하곤 했던 것이다. 사실은 그것이 농업의 원리이고 힘이며 모든 맛의 원천이었다. 그 원천을 갖고 요리하는 사람의 기질과 기술에 따라 맛의 다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를테면 서양인들이 즐기는 와인 맛과 동양인들이 즐기는 차맛의 오묘 다양함, 지역마다 집집마다 다른 맛의 개성들이 그렇게 출현했다. 지역의 맛에 대한 어떤 주관적 평가의 사례(어디까지나 주관적)들이 예가 되겠다.
제주, 서귀포는 사람도 솔직하고 맛도 솔직하다.
순천, 고흥은 사람도 미인이고 맛도 미인이다.
목포, 여수는 사람도 걸출하고 맛도 걸출하다.
진주, 창원은 사람도 단정하고 맛도 단정하다.
부산, 울산은 사람도 화기이고 맛도 화기하다.
전주는 사람도 예술, 맛도 예술이며 익산은 사람도 담대하고 맛도 담대하다. 강원도는 사람도 별미이고 맛도 별미하며 충청도는 사람도 암묵하고 맛도 암묵하다. 평안도 맛은 시원하고 함경도 맛은 모질기며 황해도 맛은 따뜻하다. 양강도 맛은 걸걸하고 연변 맛은 매몰차다.
자, 그렇다면 나는 무슨 맛이고 너는 무슨 맛일까? 우리는 이제 한 사람의 인생을 놓고 이렇게 물어야 한다. 한 지역의 문화를 놓고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