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잔치는 누구나 하는 것이고 즐거운 파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아프리카의 원주민 마을 중에 생일잔치를 하지 않는 곳이 있다고 한다. 왜 생일잔치를 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에 그들은 이렇게 답한다.
“태어남은 신성한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날짜, 시간으로 계산한단 말인가. 태어남의 신성함을 기념하기 위해서는 절대로 잔치를 벌이지 말아야 한다.”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미얀마에는 생일잔치를 매주, 매월 하는 원주민이 있다. 어떻게 생일이 매주, 매월 오는가? 생일을 1년 주기로 맞이하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들은 이렇게 답한다.
“월요일에 태어난 사람은 월요일이 생일이고, 10일 태어난 사람은 매월 10일이 생일이다. 그러니 그때마다 생일잔치를 하는 것이다. 생일잔치는 자주 할수록 좋은 것이다.”
그들은 생일을 ‘다시 태어나는 전환점’으로 인식한다. 자주 태어나기 위해서 생일을 자주 기념한다는 것이다. 이쯤되면 ‘날마다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라는 기도가 떠오른다. 과연 그렇다. 그들의 생일잔치 방식을 보면 이해가 된다. 그들은 생일잔치에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벌이지 않는다. 병원과 양로원, 보육원을 돌며 봉사를 한다. 나를 위한 잔치가 아니라 어려운 이웃을 위한 봉사로 그날을 기념하는 것이다. 생일잔치에 대한 그들의 정의는 이런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은 곧 자기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또 이런 기념은 어떤가. 아기가 태어나면 나무 한 그루를 심어 기념하는 사람들. 그 나무와 아이는 같은 생일을 기념하며 오래도록 함께 자란다. 독일의 농민들 얘기다. 그 옆 나라 스위스 농민들은 독일인들보다 한술 더 뜬다.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사과나무를 심고,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배나무를 심는다. 왜 그렇게 구분하는지,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그 나라들의 삼림이 유독 풍성한 이유는 알 만하다.
무엇인가를 처음 시작할 때 우리는 종종 이런 축하 인사를 전한다.
“시작은 미미하나 끝은 창대하리라.”
세상의 모든 창대한 것들의 시작이 다 미미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창대함은 거창함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거창은 큼 자체를 의미하지만 창대는 크고 ‘왕성하게’ 움직이는 역동성이 내재돼 있다. 멈추지 않고 변하는 역동성 자체를 기념하는 게 생일이고, 이를 기점으로 다시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의무가 생일에 주어진다는 걸 모르는 이들, 제법 많다.
그렇게 생일잔치를 많이 한 사람들, 즉 삶의 역사가 오래된 사람들, 달리 말해서 나이 많은 사람들은 모두 창대할까. 더 역동적이고, 더 지혜롭고, 판단력이 더 선명해질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오직 하나 명확한 것은 생일잔치를 많이 한 사람들의 시간은 ‘비온 뒤 강물처럼, 흙탕물처럼’ 엄청나게 빠르다는 사실뿐이다. 그즈음에 비로소 살아가는 것은 죽어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오직 그것만이 엄중한 진실이고 생일이 축복받아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