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업인은 뼈 빠지게 고생하는데 중간상인만 배를 불리다니… 농산물은 유통구조가 문제야.” 어디선가 줄곧 들어온 이야기다. 농산물 유통은 도대체 어떤 논리와 시스템으로 움직이기에 수십 년 동안 불합리한 구조라는 비난 속에 놓여 있는가. 그런데 과연 맞는 말이긴 할까?
김재민 농업전문기자(팜인사이트·농장에서 식탁까지 발행인 겸 편집장)가 쓴 <유통의 역설>을 펼친다면 농산물 시장에 대해 가졌던 착시와 오해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다.
이 책은 대한민국 농산물 유통의 심장, 가락시장의 지난 40년을 통해 우리 사회가 너무 오랫동안 의심 없이 받아들여 온 ‘유통 판타지’를 깨뜨리는 책이다.
“중간상인만 없애면 값이 내려간다”, “유통단계를 줄이면 농가 수취 가격은 올라가고 소비자에게는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다”, “온라인 직거래가 유통혁신의 정답이다”.
저자는 정부와 정치권, 언론, 정책 보고서 등에서 반복돼 온 이들 명제에 의문과 이의를 제기하며 그간 농산물 시장을 바라보던 편협한 프레임을 벗겨 버린다.
현 정부와 정치권의 ‘유통단계 축소론’과 ‘온라인 도매 확대론’이 자칫하면 농산물 유통 발전을 역행하는 근시안적인 처방이 될 것임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낱낱이 밝힌다.
이 책은 가락시장 40년사를 무대에 올렸다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 객주의 ‘칼질’(농업인에게는 물건을 싼값에 인수하고, 운송비·인건비 등은 부풀려 정산 금액에서 공제한 위탁상의 횡포)이 지배하던 용산시장의 혼돈을 뒤로 하고 합리적인 유통을 표방하며 출발한 가락시장이 걸어온 길을 ‘경제학 교과서가 실현된 현장’으로 재해석했다.
1976년 농수산물유통및가격안정에관한법률(농안법) 제정, 1985년 가락시장 개장, 이후 경매·중도매·정산 시스템의 정착까지 가락시장의 40년을 단순한 시설사가 아니라 ‘신뢰의 시스템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작동했는가’를 보여주는 기록으로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농산물 유통 본질은 ‘단계’가 아니라 ‘기능’
“선별·저장·운송·정산·리스크 부담 기능은
어떤 법과 제도로도 뛰어넘을 수 없다.”
저자는 농산물 유통의 본질은 ‘단계’가 아니라 ‘기능’이라고 강조한다. 농산물의 선별·저장·운송·정산·리스크 부담이라는 기능은 어떤 법과 제도로도 뛰어넘을 수 없으며, 누군가는 반드시 그 노력과 비용을 떠안아야 한다. 가락시장은 바로 그 기능을 가격이라는 신호에 따라 정직하게 드러내 온 시스템이었다는 것이다.
25년간 농업·축산·유통 현장을 취재해 온 저자는 우리게게 묻는다. 왜 돼지는 도매시장을 떠나 수직계열화로 흘러갔나. 반면 한우가 60% 이상 여전히 도매시장 경매로 모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편 계란이 경매 체계가 사라지자 가격 신호가 농가에게 위험으로 전가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행동경제학·산업조직론·거래비용 이론을 통해 ‘품목마다 다른 유통 논리’를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이름은 화려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던 정부 주도 유통 실험들도 다시 들여다본다. 단계 축소가 곧 비용 절감이라는 직관이 왜 현장에서 매번 무너졌는지, 그리고 그 ‘줄어든 비용’이 사실 누구에게 어떻게 전가됐는지를 데이터로 추적한다. ‘바퀴 달린 정육점’, ‘aT사이버거래소’, ‘대형마트 직거래’ 등 실패한 유통 실험들에 대한 팩트체크에 나선다.
가락시장 다음 40년은 누가 책임지나?
쿠팡·마켓컬리는 할 수 있는데 정부는 못하는 것이 있다. 쿠팡이 6조 원, 마켓컬리가 8,000억 원을 투자해 유통 인프라를 확보한 것과 달리 가락시장 현대화는 22년 동안 1조 원의 자금을 투입하며 서서히 진행될 수밖에 없다. 저자는 ‘민간 자본의 입력값’과 ‘정부의 입력값’의 격차를 정면으로 드러내며, 진정한 혁신은 구호가 아니라 자본·기술·물류 인프라라는 ‘입력값’에서 나온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묻는다. “이제 가락시장 다음 40년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정부는 농산물 도매물량의 50%를 정부 주도 온라인 도매시장이 취급하겠다고 호언했지만, 저자는 민간의 추가 투자를 통해 ‘배추와 사과 같은 농산물만 거래하는 작은 웹사이트’가 아니라, 북극항로 시대를 맞아 ‘동북아의 시카고상품거래소’로 성장할 수 있는 종합 상품거래소가 등장해야 한다며 담대한 비전과 구체적 로드맵까지 제시한다.
기후위기와 농촌 고령화가 가속화 되고, 디지털 전환과 지정학적 격변이 우리 식탁을 흔드는 이 시점에 <유통의 역설>은 한국 농업·유통 정책 담론을 다시 시작한다. 정부·국회·생산자단체의 정책 결정자, 농업·식품 분야 연구자와 언론인, 그리고 모든 소비자에게 한국 농산물 유통의 방향을 가늠하는 좌표 하나를 당당히 제시하는 책이다. (협동조합 농장과 식탁 발행/팜커뮤니케이션 출간/신국판 282쪽/2만원)